17–18 Oct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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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과 지방의 연결고리, 경주인의 존재양상

17 Oct 2024, 13:30
30m
Room 106, C1 Building

Room 106, C1 Building

Speaker

Joohee Choi (덕성여자대학교)

Description

흔히 조선을 유교적 통치이념에 기반한 양반관료제 사회로 정의한다. 양반관료제는 과거와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한 문·무관료가, 지배 엘리트로서 국왕을 보좌해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시스템을 일컫는다. 양반관료제가 작동하는 기저에는 세도가의 명망 높은 문무관료들 외에 이름 없는 경아전과 하급 원역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시대 내내 120~140여개의 중앙관서에 배속되어 왕실부양과 국가행정을 책임지던 자들이다. 행정의 최말단에서 상급자의 명을 받들어 문서 수발과 회계관리, 창고·자재관리 및 순찰 등의 일상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조선왕조가 양반관료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중앙각사에 녹사와 서리, 하급원역의 법정 인원을 정해놓고, 궐원이 생기면 충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러한 하급 관인에도 속하지 않은 채 조선시대 관료행정을 뒷받침해온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주인(主人)’층이다.
주인은 한글학회에서 지은 ‘조선말 큰사전’(1957)에 따르면, ① 한 집안의 주장이 되는 사람, ② 물건의 임자, ③ 손님을 대하는 주장되는 사람, ④ 손님을 치르는 집, 곧 여관 하숙의 뜻으로 정의된다. 특히 주인이 ④의 의미를 갖는 것은 조선시대 서울과 지방을 방문할 때 행려자들이 숙박과 식사를 담당하던 여객주인에서 그 뜻이 파생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주인’은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용례 외에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관료 신분이 아닌 채로, 국가의 특정 역을 전담하면서 대가를 받는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다.
예컨대, 조선후기 국가의 부세운송과 공물유통에서 확인되는 ‘사주인(私主人)’, ‘강주인(江主人)’, ‘선주인(船主人)’, ‘창주인(倉主人)’, ‘각사주인(各司主人)’, ‘공물주인(貢物主人)’, ‘여객주인(旅客主人)’, ‘경강주인(京江主人)’ 과 같은 이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조선시대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세, 공물 등의 자원을 도성 한강변에서 수송·보관·유통시키는 일을 맡았던 자들이다. 특히 사주인, 강주인은 조선전기 이래 외방 공리(貢吏: 공물을 중앙각사에 납부하는 지방 향리)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세공물을 보관, 방납하던 자들로서, 대동법의 시행으로 공물주인들에게 왕실, 각사의 공물조달 권한이 부여되고, 사주인들의 방납을 근절하는 조치가 행해지면서 이들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조선전기 방납에 관여한 계층으로는 앞서 언급한 각사주인들도 포함되었는데, 대동법 시행 이후 정부의 공물조달업에 참여하는 공물주인층은 사실상 각사주인의 방납을 합법화한 결과 형성된 계층이라 할 수 있다.
경주인은 같은 주인이기는 하지만, 사주인 계열과는 형성배경부터 성격을 달리한다. 경주인은 고려시대 이래 지방에서 상경해 서울과 지방의 연락사무와 부세 행정을 맡아보던 향리의 일종으로, ‘경저리(京邸吏)’, ‘저리(邸吏)’로 불렸다. 사주인과 경주인 모두 부세, 공물을 책임지고 납부하게 하는 임무를 띠었으나, 경주인은 공식적으로 지방에서 파견된 향리로서 중앙관서와 지방민에게 물자와 정보를 제공해주는 매개 역할을 했던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전세조공물 혹은 토지의 추가징수분으로 이들의 서울 파견 경비를 마련했다. 기존 연구들 가운데에는 조선시대 부세 상납과 물류유통 구조에서 차지하는 경주인의 역할과 위상을 고려해 이들을 조선시대 주요 상업세력으로 정의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경주인의 기원을 좇아가다 보면 이들은 애초에 중앙권력이 지방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기인들과 유사한 존재들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요컨대, 경주인은 고려시대부터 서울에 올라와 각종 역을 지던 자들로, 기인과 더불어 고려시대 지방통치 수단의 하나로 만들어진 향직의 일종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경주인은 기인과 달리 각사에 직접 예속되어 사환하지 않고, 지방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업무를 이어갔으며, 그 덕분에 경주인이라는 정체성을 조선말기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고려~조선 말기까지 왕조국가의 관료 행정을 지원하며, 밖으로 중앙관료·지방수령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안으로 경제적 이권을 획득해갔던 경주인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조선시대 경주인의 역할과 경주인의 경제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역가(役價)와 고리대 문제에 대해서도 천착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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