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aker
Description
제7차 임술사행(1682년)에 제술관으로 참여한 성완(成琬, 1639~1710)은 『취허집(翠虛集)』 4권 2책을 저술한바, 일본 사행의 견문과 소회 및 일본 문사와 창수한 시 33수가 권4 「일동록(日東錄)」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일본 통신사행에 제술관과 서기는 문한이 뛰어난 서얼 출신의 문인이 주로 선발되었다. 성완의 문인적 역량이 당대 인정받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완의 일본 통신사행 참여를 시작으로 그의 조카 성몽량(成夢良)은 기해사행(1719년)에서, 종증손 성대중(成大中)은 계미사행(1763년)에서 각각 서기로 종사하였다. 이는 이 집안이 서얼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완은 일본에서 자신의 시재(詩才)를 유감없이 표출하였던 바, 「일동록」에는 몇 가지 기록 양상이 포착된다. 그 중에서 일본 문사와의 시문 창수는 제술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인 만큼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완이 교유한 인물로 林春常과 木貞簡, 源璵 등이 있다. 우리에게 新井白石으로 더 잘 알려진 원여의 『도정시집(陶情詩集)』에 서문을 써 준 것은 중요하다. 이때 홍세태(洪世泰)도 발문을 써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원여는 당시 일본의 대학자였던 木貞幹의 문인이 되었고, 이후 신묘사행(1711년) 때 조선 통신사행의 접대를 전담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성완의 일본 통신사행과 기록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한일교류와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한편 성완은 김수항(金壽恒)과 남구만(南九萬) 등 당대 명사들의 연행을 전송하면서 송시(送詩)를 지어주었다. 여기에는 그의 대명의리가 잘 드러나는 만큼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 그는 「안남국 사신 풍극관의 시에 추후 차운하다(追次安南國使臣馮克寬韻)」3수와 「안남 사신 의재 풍극관의 오언배율에 차운하다(次安南使馮毅齋克寬五言排律)」를 지어 안남과 당시 안남을 대표하는 문인 학자였던 풍극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출하였다. 「유구국 사신을 대신하여 조선 사신 이지봉의 시에 차운하다(代琉球國使臣次朝鮮使臣李芝峯韻)」 10수와 「섬라 사신을 대신하여 조선 사신 이지봉의 시에 차운하다(代暹羅使臣次朝鮮使相李芝峯韻)」 5수 등 이수광(李睟光)이 북경에서 만난 유구와 섬라 사신을 대신하여 지은 시도 흥미롭다. 나아가 성완은 「한가로운 가운데 김생 진욱이 서양인 알레니의 직방외기를 소매에서 꺼내 보여주기에 읽고서 쓰다(閑中金生振郁袖示西洋人艾儒略職方外紀覽而書之)」 2수를 지은 바 있다. 이를 통해 그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서양에 대한 지식 정보 또한 일정 수준 간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성완의 『취허집』을 중심으로 일본・중국・안남・유구・섬라 등에 대한 대외인식의 양상과 특징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17세기 한 서얼 문인의 대외인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그 층위와 의의에 대한 적실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