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aker
Description
한반도의 역제는 신라 소지마립간 때 왕경에서 4개 방향으로 역로를 개설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에서 확인이 시작된다. 이후 고려지대에는 역도 제도가 확립되어, 그것이 조선왕조시대에도 개량되면서 계승되었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양 시대의 역제 사이에는 자세히 보면 조금씩 차이점이 발견된다. 우선 역도의 명칭과 구분들이 많이 달라졌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중심의 역제, 조선시대에는 한양 중심의 역제이었기 때문에, 특히 수도 주변에서 차이점이 많다. 그리고 국토 영역 자체도 다르기 때문에 북방으로 역도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선시대의 각각의 역의 입지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의 그것을 최대한 계승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고려시대 공히 국토 영역 안에 있었던 지금의 남한 영역 속에서도, 일정 부분 역들의 입지 및 분포 변화는 관측이 된다. 그것도 지역에 따라서는 인접하는 역들이 여러 개 한꺼번에 소멸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의 태백산맥 일대에서 현저하다. 예를 들어 강원도 평해에서 영양을 넘어 안동 방면으로 가는 노선, 울진에서 소천을 거쳐 순흥으로 넘어가는 노선, 옥계에서 임계를 거쳐 정선 평창으로 넘어가는 노선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해안 쪽의 기점이 읍치이거나 폐읍이고, 거기서 바로 분수령을 넘어 내륙 지방으로 다다른다는 점이다. “도로고”나 “대동지지” 등 조선시대 지리지에 게재된 교통로를 보면, 이 일대 읍치로는 원주에서 대관령을 넘어 삼척 울진을 거쳐 평해도 나가는 경로가 대로(평해로)로 지정되어 있다. 얼핏 보면 우회로이긴 하지만, 대관령 영로가 원주와 강릉 등 2대 도호부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대관령 길이 수축되어 다른 영로보다 통행이 훨씬 수월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역로로서는 폐지된 다른 영로들에는 대신 역터를 중심으로 원 그리고 원을 계승한 주막촌들이 남아, 역로 아닌 말하자면 ‘원로’로서, 지방간 교통로로서 그 명맥을 이어 갔다. 이는 ‘역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역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원의 성격을 잘 부각시켜 주는 대목이다. 원에는 역과 달리 공무 여행자를 위한 역마 공급 역할은 없지만,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니 도보 여행자들에게는 충분히 그 기능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