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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작성된 분재기와 입안을 통해 신분의 경계를 넘어 사로(仕路)를 성취해 낸 한 사례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탐구 대상의 주인공은 박응장(朴應長)이다. 박응장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알려진 박세현(朴世賢)의 아들로 본래 박세현의 얼자(孽子) 즉, 천첩자(賤妾子)였다. 그러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에 따라 박응장은 문‧무과와 생원‧진사시의 응시가 불가능했다.
박세현 또한 일찌감치 막내 동생 박세렴(朴世廉)의 아들 박의장(朴毅長)을 시양(侍養)하여 양육했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 계후(繼後)를 받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국가적으로 ‘납속(納粟)’을 통해서 벼슬길이 가능[許通仕路]해지게 되자, 박세현은 박세렴(朴世廉)과 논의하여 기존 시양을 깨고 얼자에게 과거 응시의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 과정 안에서 20여 년이나 키웠던 박의장에게도 일정 노비를 물려주는데, 이는 정이 친부자와 같다는 이유였다. 이후 박응장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판관 등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박세현의 재산을 물려받고, 이후에는 봉사권(奉祀權) 또한 획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당시 조선에서 납속과 허통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 중이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는 데 막대한 군량이 필요해지자 조선 정부는 정책적으로 납속을 통해 군량을 확보하고 기민(飢民)을 구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대상 위에서 공사천(公私賤)의 면천과 서얼의 허통이 가능했는데, 이때 영해 무안 박씨 집안에서도 기회를 포착하고 가족 간의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얼자 박응장이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바탕을 조성해 줬다. 특히, 조선시대 납속정책은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나, 실상 납속자(納粟者) 개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발견하기 어려워 납속을 통한 허통의 실례가 논의된 적은 드물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영해 무안 박씨 집안에 전해지는 분재기 2건, 입안 신청 소지 1건, 입안 1건을 중심으로 임진왜란기를 전후로 국가적으로 시행한 납속정책의 실제 적용양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국가 정책이 한 집안에 미친 영향, 특정 가문 안에서 협의를 통해 형성해 간 합의점, 그 흐름 안에서 한 개인이 신분의 경계를 뛰어 넘어 성취해 나간 성취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