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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표는 조선시대 유교적 통치질서 내에서 끊임없이 배제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음에도 향촌의 질서유지와 정서적 통합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무당에 대해 조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재고함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의 무당은 독립된 경제주체로서 납세의 의무를 졌으며 세습적 혈연집단이자 예능집단인 창우집단을 이끄는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그들이 공동체를 위해 수행한 공적 역할을 ① 종교 사제자, ② 전문 예능인, ③ 의료인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논의해 본다.
첫째, 무당은 종교적 사제자(priests) 혹은 영적 매개자(spirit medium)라는 독특한 신분적 특징에서 무의식(巫義式)의 공적 행사에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활동했음을 살핀다. 이는 오늘날 마을 굿에 보이는 유교적 제례와 굿의식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 무당이 유교의 남성 제관과 동등한 사제자로서 의식을 집행하고 있고 실제 그와 같은 역할을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무속을 탄압하였지만 동시에 통치에 활용한 측면이 있으며, 조선 민중들 사이에 깊게 뿌린 내린 토착 신앙은 이러한 무당의 존재를 지속시킨 충분조건이 되었다.
둘째, 무당의 구비 요건으로서 유흥과 놀이의 담지자로서 예능인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음악과 춤은 굿에 불가결한 요소이며 뒷전에 흔히 보이는 연극성은 전문 예인으로서 무당이 갖춰야 할 기본 면모라 할 수 있다. 서울의 <창부타령>, <노랫가락>, 제주의 <서우제소리> 등이 굿에서 비롯된 유행가라면 평안도의 <덕담무가>, 동해안의 <심청굿>, <고산염불> 등은 굿이 당대의 음악을 꾸준히 수용한 결과임을 증명한다. 굿음악에는 이와 같이 무당과 당대 민중들이 소통해온 다양한 음악의 흔적이 있고 이는 무당이 음악과 놀이를 통해 사회 통합의 기능을 수행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셋째, 무당이 담당했던 광범위한 치병 행위에 대해 주목한다. 조선시대 무당의 소속관청인 성수청(星宿廳)과 활인서(活人署)의 기능과 관련시키지 않더라도, 민간에서는 소소한 병이나 특히 정신적 질환의 경우 병굿을 통해 다스리는 관행이 보편적이었다. 개인의 치병은 또한 사회의 안정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므로 조선시대 무당의 치병 행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조선의 무당이 천역을 수행한 당대의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통합과 유지에 실질적이고 긴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오늘날 가치의 다양성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