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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표의 목적은 왕자 부인들의 존재에 주목하여 그들의 지위와 활동을 검토하고, 기존의 왕비와 후궁을 중심으로 한 왕실여성 집단의 범주를 확대하는 한편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밝히는 데에 있다. 더불어 세계의 한국학자들에게 조선 왕실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연구 경향도 소개하고자 한다.
왕자의 부인은 곧 국왕의 며느리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내명부(內命婦)에 포함되지 않고 외명부(外命婦) 소속이었다. 외명부는 왕의 딸인 공주와 옹주를 비롯해 궐 밖에 사는 종친의 아내, 문무 관료의 아내 등에게 내린 작호였다. 왕자는 태생부터 지극히 높은 위치에 있는 국왕의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제외하고는 궁궐 밖에서 살아야 했다. 이것이 왕자의 부인이 국왕의 며느리이면서도 외명부를 받은 이유이며, 왕실 여성 구성원과 양반 여성의 ‘경계’에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왕자의 부인이 받은 작호는 외명부였으나 이들의 지위와 활동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들은 법적으로 외명부 최고 작위인 정1품에 봉작 되었고, 왕비가 주관하는 친잠례와 양로연, 국혼 등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석하여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흥미로운 점은 의례 식장에 단순히 참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사의 주관자 중 하나인 집사(執事)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또 이들은 가옥을 비롯해 토지·노비 및 각종 물품을 하사 받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소송 분쟁에도 관여했으며, 부인 자신의 명의로 재산을 소유하고 증여할 수 있었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부인 신씨의 사례도 흥미롭다. 왕실 여성의 온천행이 드문 시대에 신씨는 부산 동래의 관사에서 몇 달간 머물며 온천을 강행해 국왕과 조정 대신들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또 숭유억불의 사회에서 불사(佛事)를 일으켜 관료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더구나 여러 논란과 비판에도 신씨는 법회를 주관하거나 암자를 조성하는 등의 과감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이 발표는 그동안 왕실 여성으로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던 왕자 부인들의 존재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그들의 공식적인 지위와 활동의 의미도 짚어볼 예정이다. 또 이 발표에서 소개할 광평대군의 부인 신씨가 일으킨 논란의 내용은 왕자 부인의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어서 조선시대 역사상의 심화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된다.